제목: 바움가트너 (원제: Baumgartner)
글쓴이: 폴 오스터
번역: 정영목
펴낸 곳: 열린 책들
오랜만에 읽은 소설책이다. 매번 전공서나 과학 책에 손이 가던 중에 요즘 이북리더기를 계기로 다시 잡식성이 살아나고 있다. 원래도 이것저것 읽는 걸 좋아하는 지라, 이번에도 그냥 크게 고려하지 않고 소설책을 대뜸 골랐다.
책의 첫인상은 사실 자서전과 비슷한 결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이름이었고, 한 인물의 시선만을 따라갈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대충 예상했던 결대로 이야기가 흘러가긴 했지만 자서전 보다는 일기에 더 가까운 느낌의 소설이었다. 사실 일기가 곧 자서전의 재료가 된다눈 걸 생각하면 결국 자서전 같은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좀더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했기에 일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책의 화자는 덤덤한 말투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처한 상황은 마냥 덤덤하기 어렵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낸 10년 뒤의 모습으로, 언젠가 누구나 겪을 일의 그 뒤를 그린 내용이다. 나 역시도 세상에 단 한 명인 엄마를 보내드린 후, 다소 절망적인 시간을 보냈기에 같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그 마음이 공감되었다. 누군가를 다시 보지 못한 채, 흘러가는 시간과 멈춘 시간 사이에 놓인다는 것은 꽤나 쉽지 않다는 정도로 말이다. 그런 그의 시간이 흐르는 모습이, 생각이 내게 위로가 되기도, 또 수긍이 되기도 했다.
책은 그리 긴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가볍게 읽기에 나쁘지 않은 분량이다. 거기다 주인공의 시선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느낌의 글이다보니 막힘없이 어려움없이 쉽게 읽힌다. 하지만 이 글을 쉽게 읽을 시간 때우기용 책으로 추천한다는 건 아니다.
이 책은 내용도, 결말도 어느 하나 가볍거나 간단하지 않다. 그렇기에 쉽게 읽히는 책을 찾는 사람보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누군가의 삶을 들어보고 싶어질 때 꺼내는 건 어떨까 싶다. 나 역시도 내가 헤맨 길의 어딘가를 누군가는 어떻게 겪었는지를 조금은 엿볼 수 있는 글이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글의 결말이 조금은 막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져서 마냥 깔끔하고 쉽지 않다고 여겨진다. 결말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아쉽게도 이 책을 쉽게 내밀기 어려울 듯 하다.
아래는 책의 내용 중 인상 깊은 부분을 적은 부분이기에 혹시라도 스포가 싫다면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덧붙여서 부분적인 이후 내용만 보기 보다 언제나 그렇듯 전체 글을 읽어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리고 해당 책은 전자책이기에 따로 페이지 표시는 하지 않았음을 참고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빠릿빠릿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그보다 훨씬 큰 것이지만. 어쩌면 늘 깨어 빛나는 상태라고 묘사할 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아주 간단하게 환하게 빛나는 자아의 힘, 감정과 사고가 서로 얽혀 복잡하게 춤을 추는 가운데도 안에서 밖으로 한껏 뿜어져 나오는 인간의 살아있는 상태— 아마도 그 비슷한 것일 듯 하다, 말이 되는지는 몰라도.
둘 사이에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고 그저 상대가 있는 쪽을 흘끔거리는 눈길이 두어 번 오갔을 뿐이다. 그렇게 서로를 재보면서, 둘 사이에 뭔가가 시작된다면 생길 수도 있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의 잠재적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검토해 보았고, 그런 뒤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작은 미소, 그에게서 흘러나온 작은 미소.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홉 해 전 여름 그녀가 케이프코드의 파도 속으로 달려들어갔다가 사나운 괴물 같은 파도와 마주쳐 등이 부러져 죽기까지 이어진 그의 하나뿐인 인생. 그녀가 죽은 그날 오후부터 — 안 돼, 바움가트너는 자신에게 말한다, 지금 거기로 가면 안 돼, 이 한심한 똥가방 같은 놈아, 꾹 삼키고 냄비에서 눈을 돌려, 이 멍청한 좆 대가리야, 아니면 이 두 손으로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거야.
사실 이 문장은 엄마를 보내고 한참을 동굴 깊이 갇혀 있던 내 모습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적어두었다. 위의 문장들 또한 소중한 누군가를 보내고 자꾸만 회상하는 그 모습이 당연한 것임을, 덮어두고 떨군 고개를 들어올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함을 긴 호흡으로 그려준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에 관련된 내용은 그 뒤에 더욱 자세히 설명된다.
(…) 그 후, 바움가트너는 영구적 절단의 경우에는 팔이나 다리를 잃은 거의 모든 사람이 오랫동안 사라진 팔다리가 여전히 자기 몸에 계속 붙어 있다고 느끼며, 심한 통증이나 가려움증이나 통제 불가능한 경련, 또는 팔다리가 줄어들었거나 고통스러운 형태로 뒤틀렸다는 감각이 수반되는 일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오후 신들은 아직 젊은 자아가 왕성한 힘을 내뿜고 있던 아내를 그에게서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그의 팔다리가 몸에서 뜯겨 나갔다. 네 개 전부, 팔 둘과 다리 두 개가 모두 동시에. 머리와 심장이 그 습격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저 삐딱한 마음으로 히죽거리기나 하는 신들이 그에게 그녀 없이 계속 살아가도 좋다는 의아스러운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어쩌면 이 부분이 가장 바움가트너가 아내를 떠나 보낼 때의 그 아픔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도 엄마를 보낼 때, 왜 하필 많은 사람 중 우리 엄마여야 했을지 신을 많이 원망했다. 물론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탓일까?’ 하며, 자책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바움가트너처럼 순수하게 원망하지는 못했다. 가족들은 당연히 내게 학업과 간병을 맡겼고 나는 그로 인해 당연하게 포기한 선택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으니 말이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빠르게 찾아와야 하는지, 도대체 내가 뭘 그리 큰 잘못을 한 건지 탓한 것 때문인지 그처럼 신에게만 책망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마음은 꼭 닮았노라 말할 수 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책에서 바움가트너가 표시한 이 표현이 내게는 당시의, 그리고 현재의 나를 너무나도 잘 표현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말하자면, 솔직히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도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예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이 글만 보면 그가 참으로 담담하게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나는 그가 소화하지 못한 슬픔을 토해내고 있다고 여겨졌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 뒤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 역시도 엄마의 죽음을 받으들이고 나서는 소화되지 않는 슬픔에 울컥거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이런 감정은 세월이라는 시간으로도 적응되는 그런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는 걸 글 속의 바움가트너가 내게 토닥이듯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발을 바닥에 딱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위태로운 내적 공간에 살고 있었고, 그로 인해 두 손에 감장할 수 없이 넘쳐 나는 시간을 들고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 부분이 그가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였으나 마냥 담담하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나 역시도 그러했듯 말이다. 소화되지 않은 슬픔은 문장 속 그처럼 멈춘 시간을 들고 속절없이 그 순간만을 재생하게 되니 말이다.
물론 바움가트너는 계속해서 울컥대는 슬픔을 토해내고만 있지는 않는다. 다시금 삶을 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생각을 내게 대입해보면서 응원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쉬운 주제가 아닌 글이라, 사실 모든 글들이 공감되거나 뇌리에 남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아내의 죽음을 직면하고 덮어두는 과정이 내게는 누군가 나도 그랬다며 토닥여주는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라 유독 이 부분이 내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은 여전히 내게 어려운 책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 아마 다음에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일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