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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회학적 읽기 (전자책)

2025년 6월 20일 오전 6:5089

도담하 DODAMHA
예술의 사회학적 읽기 (전자책) Cover Image


지은이: 최샛별, 김수정

펴낸곳: 도서출판 동녘

전자책 발행일: 2023.04.10.


예술이라는 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보이는 그대로 즐기는 것도 예술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해당 예술이 어떤 배경으로, 어떤 뜻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같이 고려하면서 분석하는 걸 좋아한다. 이런 내게 사회학적 관점으로 예술을 본다는 게 흥미로운 접근법이었다.

책은 과거부터 현재의 긴 시간들에 걸쳐 생긴 예술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이와 관련된 관계들과 의미들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항상 예술이라고 생각하면 고전 유럽의 문화만 연결했던 내게 이렇게 차근차근 그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새로운 접근법이기도 했다.

책에 제시하는 예술은 계속적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 대해서 책은 다이아몬드 형의 분석틀과 함께 어떤 형태로 변화하고 있으며 사회와 예술의 관계성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함께 제시한다. 물론 큰 틀에서의 변화는 계속된다고 생각된다. 사회와 예술 그리고 이를 수용하는 대상, 이렇게 세 가지 주요한 요소들은 거의 고정된 채 그 방향성이 어떻게 향하게 되면서 누가 영향을 주거나 받는지가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이들의 관계 안에 새로운 요소가 생겨날 수 있지만 결국 주요한 세 요소들은 거의 일관되게 다이아몬드 형의 분석틀에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관계도가 불분명한 경우도 생기게 된다. 단순히 예술이 누군가가 표현한 것과 수용하는 대상이 있던 관계가 아닌,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뭉쳐지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관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 글 역시도 이런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 역시도 사회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서 사람 간의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에서의 변화 또한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이 글은 사회학이라는 학문적인 시각으로 예술을 분석한 글이기에 가볍게 읽을 책으로 추천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예술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하고 싶은 사람이거나 사회학적인 관점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과감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적당한 양과 흥미로운 내용들로 엮인 책이기에 전문적이면서도 무겁지 않은 주제이기에 힘들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아래 글들은 책의 내용 중 마음에 드는 부분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부분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자투리 글들을 통해서 책의 전부를 감상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지해주시길 바란다. 반드시, 전체 책을 읽어주시기를 추천한다. 또한 해당 책은 전자책이기에 따로 페이지는 붙이지 않았다.


문화는 곧 서구 유럽의 귀족과 엘리트의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매우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개념이었다. (…) 이 전통에서 문화는 서구 엘리트 문화인 순수예술만을 지칭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 예술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던 아놀드에게 노동자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정치선동적인 문화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 리비스는 특히 매스미디어에 의해 생산되는 대량문화에 적대적이었는데, 대중들이 주로 보는 신문과 라디오가 비교육적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건 이러한 시각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이 보는 예술에 대한 시각과 지금의 예술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졌기도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시각으로 예술을 보기 때문에 예술이 어렵게 느껴졌던 건 아니었을까.

(…) 순수예술의 대척점에서 무정부로까지 치부되며 온갖 비판과 비난을 받던 대량문화가 사실상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학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부분은 현재의 예술에 대한 부분과도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여전히 대중문화에 대한 의심이 계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영향력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좋은 부분만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처럼 사회적인 영향력이 엄청난 예술이 소비의 주체가 엘리트 계층 혹은 예술을 이해하는 특정 계층이 아닌 다수라는 부분에서, 단순히 대중 문화로 분류되고 과도하게 비하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반영이론적 접근은 예술이 그 사회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책에서 가장 공감되던 부분 중 하나다. 어릴 적부터 예술과 당시 사회에 대한 분석하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해당 예술들을 당시 사회에 연관 짓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간혹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다소 지금의 관점에서는 불편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음에도 해당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곧바로 이해된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해당 접근법은 어느 정도 주관적인 해석에 가깝기 때문에 그 정도가 객관적 혹은 절대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형성이론적 접근을 취하는 많은 논의들 속에서 예술을 소비하는 수용자들, 특히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문화 산업 내에서 획일적, 기계적으로 생산되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콘텐츠를 아무런 의심이나 비판없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간주된다. 예술 소비자를 마치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것이다.

또한 폴 허쉬 Paul Hirsh는 발매된 싱글 앨범의 60퍼센트는 아무도 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현상은 문화 산업이 소비자를 쉽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분석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대중 문화의 소비자는 단순히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일까?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폴 허쉬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아이돌의 경우에도 많은 아이돌이 쏟아지고 있지만 결국 대중에게 닿는 아이돌을 몇몇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대중이 마냥 무의식적으로 수용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요즘 같은 SNS를 통한 소통이 활발한 때에 이러한 수동적인 대중은 상상하기 더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시선은 대중 문화가 많은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에 생긴 결과로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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